의 견 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일부개정안
제34조의2(업무상질병의학자문위원회 신설)에 대한 반대 의견
의견의 요지
노동안전보건정책에 대해 고민해 온 우리 단체는 이번 입법예고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 중 업무상질병의학자문위원회를 신설하는 안(제34조의2)에 대하여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힙니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보험의 업무상 질병 인정에 대하여 자연과학적·의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된 인과관계만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어, 이러한 좁은 인정 기준으로 인해 불승인 처분을 받은 재해자와 유족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의 문제점을 앞장서서 개선해야 할 고용노동부가 오히려 의사 중심의 자문위원회를 신설하는 것은, 재해자의 작업 환경 등 제반 조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산재 인정 기준을 엄격한 의학적 잣대에만 매몰시킴으로써 산재보험 제도를 더욱 후퇴시킬 우려가 큰 조치입니다.
대법원은 확고한 판례 법리를 통해 "업무상 질병의 상당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 명백성이 아닌 '규범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해 왔습니다. 현 정부 역시 산재보험에 대하여 실질적인 사회보험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하고자 '규범적 인정 기준의 법제화'를 국정과제로 채택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의학자문위원회 신설 조항은 대법원의 법리적 해석에 정면으로 반할 뿐만 아니라, 정부 스스로 정책의 일관성을 저해하는 부적절한 입법입니다.
산업재해 인정 기준은 산재보험법령의 목적과 취지를 고려한 규범적 판단의 영역이지 자연과학적·의학적 판단 영역이 아닙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1조는 “업무상 재해를 신속·공정하게 보상”하고 “재해근로자의 재활 및 사회복귀를 촉진”하여 궁극적으로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하는 것을 제도의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역시 산재보험을 단순한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책임보험이 아닌 ‘국가가 책임을 지는 의무보험’이자 ‘사회보장제도’로 파악하며, 보험재정 확보보다는 재해근로자의 생활 보호와 이익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을 거듭 확인해 왔습니다(대법원 2022. 3. 24. 선고 2021다241618 전원합의체 판결, 헌재 2013. 9. 26. 2011헌바271 결정 등).
이러한 사회보험적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산재보험에서 요구하는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는 제도의 보호 범위를 획정하기 위한 관문이자 규범적 요건이지, 무결점의 자연과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법부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4조 제1호에 정한 '업무상의 재해'라고 함은 근로자의 업무수행 중 그 업무에 기인하여 발생한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업무와 사망의 원인이 된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지만,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적어도 업무상의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에 겹쳐서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켰다면 그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입증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판시하여 규범적 판단의 원칙을 확고히 세웠습니다(대법원 2001. 7. 27. 선고 2000두4538 판결, 대법원 2004. 3. 26. 선고 2003두12844 판결 등).
또한 대법원은 상당인과관계 판단의 잣대가 '건강한 평균인'이 아닌 '당해 근로자의 구체적 신체조건'이어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지병이나 장애가 있는 근로자에게는 동일한 노동도 다른 무게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며, 과로와 스트레스가 기존 질환을 자연적인 진행 속도 이상으로 악화시켜 병을 유발했다면 이 역시 산업재해로 보아야 한다는 대법원의 입장은, 엄격한 의학적 잣대가 아닌 노동 현장의 실체적 진실을 반영한 지극히 타당한 법리입니다. 아울러 시행령 별표에 명시된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또한 예시적 규정에 불과하므로, 목록에 없는 질병이라도 상당인과관계가 규범적으로 추단된다면 산재로 포섭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대법원 2004. 3. 26. 선고 2003두12844 판결, 대법원 2014. 6. 12. 선고 2012두24214 판결).
요컨대, 업무상 질병의 인정은 질병의 의학적 기전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가 직면했던 노동의 현실을 읽어내고 사회적 보호의 테두리 안으로 품어내는 일입니다. 한정된 사회보험 재정 안에서 기준 바깥에 놓인 노동자를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고도의 ‘사회적·규범적 결단’의 영역이지, 결코 의학 전문가들의 자문회의의 안건이 될 수 없습니다. 산재보험의 목적과 확립된 사법부의 법리를 도외시한 채, 자연과학적·의학적 판단 기준으로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을 세우려는 시도는 진정한 사회보험으로 바로 서야 하는 산재보험 제도의 근본 취지를 훼손하는 퇴행적 시도입니다.
개정안(제34조의2 신설)에 반대하는 이
① 위원회 인적 구성의 한계: 상당인과관계의 '규범적 판단' 약화 우려
개정안에 따른 ‘의학자문위원회’는 그 자격을 전문의 또는 관련 분야 박사로만 한정하고 있습니다. 최대 25명의 위원 중 노동안전보건 전문가, 산재 전문 법률가, 직업환경의학 현장 전문가 등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주체들의 참여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질병의 진단은 의학의 영역이나, 해당 질병과 노동 환경 간의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종합적인 규범적 판단의 영역입니다. 현장의 노동 실태에 대한 고려 없이 의학적 기준에만 치중될 수 있는 위원회의 구성은, 사법부가 오랜 기간 확립해 온 '규범적 상당인과관계' 법리와 조화를 이루기 어려우며 산재 인정의 문턱을 실질적으로 높일 우려가 있습니다.
② 사법부 판결 경향과의 괴리: 소송 패소율 증가의 근본적 해결책으로서의 한계
현재 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이 법원에서 취소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공단 내부의 「2025년도 소송상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행정소송 패소율은 2020년 13.1%에서 2025년 23%로 증가했으며, 패소 원인의 과반(50.2%)이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시각차, 즉 '법령 해석의 견해 차이'로 나타났습니다. 법원은 산재보험의 사회보장적 취지에 따라 제반 사정을 종합적·규범적으로 살피는 반면, 공단은 엄격한 의학적 인과관계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학 중심의 자문기구를 신설하는 것은 공단과 법원 간의 견해차를 좁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 어려울 것으로 사료됩니다.
③ 기존 현장 조사 권한의 활용 축소 및 위원회 소견 의존 우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현장 조사 및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공단에 충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제31조 자료 제출 요구권, 제117조 사업장 및 관계자 조사권). 그럼에도 실무상 현장 조사보다는 서류상의 의학적 소견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상설 의학자문기구가 신설될 경우, 일선 판정 과정에서 재해자의 구체적 사정이나 작업 환경을 면밀히 조사하기보다는 위원회의 의학적 소견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재해근로자의 개별적 사정을 기준으로 인과관계를 판단하라는 대법원 판례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④ 운영 체계의 포괄적 위임과 절차적 투명성 확보의 과제
개정안 제34조의2 제3항은 위원의 위촉, 이해충돌 방지, 회의 운영 방식 등 위원회의 핵심적인 운영 사항을 공단 내규로 포괄 위임하고 있습니다. 보험급여 지급 주체인 공단 내부에서 자문단 운영을 전담하게 될 경우, 산재 인정의 실질적 잣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투명성 확보에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법 제37조 제5항이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한 것은 사회적 합의와 입법예고 등 투명한 절차를 거치도록 하기 위함이며, 법원은 이 기준을 예시적 규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단 내부 위원회가 의학적 근거를 중심으로 개정안의 밑그림을 주도하게 된다면, 하위 규정에 의해 대통령령의 제정 취지와 폭넓은 해석 여지가 실질적으로 축소될 우려가 존재합니다.
결론
산재보험은 일하다 병든 노동자가 하루빨리 치료받고 일터로 돌아가도록, 그동안 가족의 생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 차원의 사회보험입니다. 산재보험 제도의 개선이란 곧 산재 인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여 제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생계의 위협에 놓이는 노동자를 줄이는 일이어야 합니다.
인정 기준을 다듬을 공식 논의 기구가 필요하다면, 산하 기관의 비공개 의학자문위원회가 아니라 고용노동부 차원에서 노사 대표, 법률 전문가, 산업안전보건 및 직업환경의학 전문가가 고루 참여하는 (가칭) 규범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2026년 6월 15일
노동건강정책포럼